초반기 시대(1894-1934)

 

 

시작 
정신분열증의 역사 
정신분열증의 특징과 종류 
정신분열증의 정신분석적 치료 
정신분열증의 정신분석 치료 역사 
심리적인 관점에서 본 정신분열증의 원인 탐색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 정신분열증의 원인 
정신분열증의 정신분석 심리치료 사례 
망상 장애(편집증) 
치료자 소개 
전문 사이트 소개 
해리 장애(빙의 현상) 
대화치료의 효과? 
심리치료 효과? 
치료자에 대한 평가? 

 

 

프로이트 가족

결혼 직후 프로이트 가족 사진(뒷줄에서 왼쪽 세 번째가 프로이트, 두 번째가 부인 마샤)

 

 

정신분열증에 대한 정신분석 치료

 여기에서 소개되는 정신분열증에 대한 정신분석적 치료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독자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에 정신분석적 치료 접근은 환자에게 약물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정신분석 치료기법을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약물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1895-1934년까지

정신 의학에서는 크게 정신증과 신경증으로 구분을 한다. 정신증에는 정신분열증, 조울증, 편집증, 멜랑꼴리아(멜랑꼴리아는 1980년 이후에는 정신 의학에서 사라졌다. 심한 우울증 혹은 신체 우울증으로 부른다) 등이 있고 나머지는 신경증으로 분류 된다. 그러나 1980년 이후에 정신과 의사이나 정신분석가인 코넬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컨버그(Kernberg)는 정신증 그룹, 신경증 그룹, 그리고 보드라인 그룹으로 구분을 했다. 보드라인 그룹에는 정신증과 신경증에 포함되지 않는 심한 성격장애가 포함된다. 최근에는 성격장애 치료가 활발해지면서 정신증, 신경증, 성격장애로 구분을 하고 있다.(Kernberg,1992)

 정신증은 결혼 생활, 직장생활, 사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로써 대부분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해서 입원 치료를 받는 사람들로 심한 경우에는 평생 동안 병원에 입원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신경증은 결혼 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그 개인이 받는 고통 때문에 주로 통원 치료를 하는 사람들로 구분이 된다.

 프로이드는 히스테리아를 약물로 치료를 하지 않고 최면으로 치료를 하다가 최면으로 치료가 충분하지 못함을 깨닫고 순수한 심리적 요법으로 치료를 하는 정신분석 치료를 창안해 냈고 이것이 학문으로 연구 개발되면서 정신분석학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이 등장한 것은 프로이드가 친구이자 선배이고 그리고 스승으로 모셨던 브로이어의 영향으로 최면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최면학이 최면이 걸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고 또 최면의 핵심 기법인 기억의 회복과 감정 방출인 카타르시스로는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최면 요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치료 기법으로 고안한 것이 프로이드와 브로이어가 공동 작품으로 히스테리아의 연구가 출판됨으로써 1895년에 정신분석 치료가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드는 정신증에도 많은 연구를 했다. 그는 조울증의 치료를 하면서 조울증 환자가 우울증과 조증의 중간 시점에서 치료를 하다가 조증이 되면서 환자가 치료를 중단했다. 그리고 두 개의 조울증 치료를 해서 성공을 한 것을 보고하기도 했다(Rosenfeld, 1987). 그러나 조울증은 전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다. 프로이드가 직접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를 한 적은 없었으나 그는 1911년 독일의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일으킨 스케레버가 쓴 자서전을 읽고 이것을 분석학 유명한 스케레버 분석에서 스케레버가 호모섹스를 방어하기 위해서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노트했다.

 여기에 많은 분석가들이 자극을 받아서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정신분열증에 정신분석 치료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정신분열증에서 전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ego(현실적인 기능을 하는 자아를 말함)가 너무 약해서 환자들의 충동에 쉽게 굴복해버리고 환자의 병적인 충동을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는 대상(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할  리비도(마음의 에너지를 말함) ego로 흘러가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하는 것을 철회하고 내면의 자아 속으로 움추려 들어가 버린다고 노트를 했다. 그는 말하기를 강한 ego가 필요하다. 이 강한 ego를 발판으로 병적인 상황을 컨트롤 하면 정신분열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가닥의 희망을 남겨 놓았다.

그는 1933년 쓴 정신분석학 개론에서 최종으로 정신분열증과 몇몇 정신증에 대해서 결론을 지었다. 프로이드는 전이가 형성되는 전이 신경증은 정신분석 치료가 되지만 전이가 형성되지 않는 조울증, 정신분열증, 편집증, 심한 나르시즘 등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한 가닥의 희망은 남겨 놓았다. 나는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방법 상에서 적당한 변화를 하면 우리는 이런 반-암시적인 문제를 극복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 고로 정신증의 심리치료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Rosenfeld, 1987).라는 여운을 남겼다.

프로이드의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나 남긴 강한 ego의 형성과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의 일부 변경의 힌트에 힘 입어서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정신증에 해당되는 편집증, 조울증, 정신분열증, 그리고 나르시즘 장애의 치료에서 전이가 형성되어 치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정신분석 치료가 전체 정신장애의 치료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조울증의 치료에서 초반기에 조울증 환자에게 전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프로이드의 의견에 동의를 했다가 1912년에 조울증 환자 한데서 전이가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한 독일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프로이드의 수요일 연구 모임 그룹의 한 멤버였던 칼 아브라함(Karl Abraham)이었다(Stone, 1983).

아브라함(Abraham)은 조울증 치료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08년에 그는 조발성 치매(정신분열증의 초반기 이름)와 히스테리아의 차이점을 기술을 했다. 그는 1911년에 6명의 조울증 환자를 치료한 결과 이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좋은 치료 결과를 얻었다. 이들 중에 한 사람은 20년 동안 멜랑꼴리아로 고생을 해오다가 2개월 만에 회복이 된 사례도 들어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우울증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고 2개의 사례에서는 조증의 가속화가 온건해졌음을 보고 했다. 6번째 사례에서 그는 조울증 환자를 6개월 동안 치료를 했고 재발은 없었다(Rosenfeld, 1987).

아브라함은 이들 환자들 한데서 전이가 형성된다는 것을 확실이 했다. 그는 그의 연구가 불완전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정신분석이 치료적 허무주의의 길로부터 빠져 나오게 정신 의학을 리더 해 나갈 것이 확실하다라고 코멘트를 했다. 이것이 이후에 많은 분석가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조울증 치료에 많은 학자들이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분석가가 에디스 제이곱슨(Edith Jacobson)이다. 그녀는 1935년 이후에 등장 인물로써 설명이 되어질 것이다.

프로이드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 정신분열증 치료에 도전한 사람이 스위스 출신의 파울 베제르(Poul Bjere)였다. 그의 치료 이론은 1908년에 에들러(Adler)의 논문에서 편집증 환자의 가설과 프로이드가 1911년에 스케레버의 분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1912년에 프로이드의 논문집에 편집증 환자의 치료 사례를 실었다.

베제르의 환자는 52세의 독신 여성이었다. 이 여성이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길거리에 있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음탕해서 혀를 내민다는 망상을 개발했다. 이 여성이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여성들로부터 분리를 할 수 없고 중요한 여성들 한데 밀착된 애착을 보여주었다. 수개월간의 치료 후에 베제르는 그녀의 정신증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낼 수 있었고 그녀는 병들기 이전의 좋은 기능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편집증 환자가 전이를 형성할 수 있고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프로이드도 인정을 했다(Stone, 1983).

프로이드 밑에서 수요 모임의 한 멤버로써 항가리 정신분석학회 회장인 프렌치(Frenczi) 1911-1912에 편집증 환자의 사례에서 잠재적 호모섹스 갈등에 관계를 해서 논문을 썼다. 프렌치(Frenczi)는 프로이드의 치료 기법이 너무 수동적이라고 주장하고 편집증 환자들과 같은 심한 환자들에게 분석가가 능동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신분석 기법의 수정을 주장했다.

그는 능동적 치료 기법을 적용해서 한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 했다. 그녀를 그의 무릎 위에 앉히고 어린 시절에 박탈당한 사랑을 대리 만족으로 충족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컨트롤할 수 없는 감정을 도발했다. 치료를 실패로 끝이 났다.

그는 프로이드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프로이드는 프렌치에서 분석가의 반 전이를 이야기했다. 여기에서 정신분석에서 유명한 반 전이 문제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Stone, 1983).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는 미국에 이민을 온 아돌프 메이어(Adolph Meyor)가 정신분열증에 생리적인 원인을 부인하고 심리적 환경적 기질적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분석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었다. 메이어(Meyor)는 정신분석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이론을 존경하고 프로이드의 새로운 치료 움직임을 존중했다.

미국의 정신분석에서 개척자 역할을 한 사람은 미국 정신분석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이사도라 카리오트(Isador Coriat)였다. 그는 1917년에 정신분열증에 낙관론을 제시를 했다. 메이어(Meyor)를 인용하면서 정신분열증의 치료에 병적인 성격의 바탕을 강조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순수한 심리적인 원인으로 볼 것을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토르 토스크(Victor Tausk)가 편집증 정신분열증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치료에서 ego의 영역 상실을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왔다(Stone, 1983).

20세기 초반 20년 동안의 특징이 새로운 치료 기법인 정신분석에서 무비판적인 열정이 특징을 이루었다. 프로이드에 의해서 원초자아(id)에 중심을 둔 이론이 ego 중심의 ego 심리학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23년에 프로이드가 마음의 구조를 정교화했다. 마음을 원초 자아(id), 자아(현실적 기능을 하는 자아), 초자아(superego)로 본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3두 마차라고 불리게 되었다. 몸을 지배하는 주인인 마음은 세 가지로 쪼개져서 이것이 통합되어있다는 이론이었다. 마음은 하나가 아니고 쪼개져 있다는 이론은 이후에 정신분열증 혹은 편집증 혹은 심한 성격장애를 치료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우리의 뇌는 생리학적으로 2개로 되어있다. 좌뇌와 우뇌가 그것이다. 눈은 두 개이고 귀도 두 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 개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는 서로 잘 통합이 되어있어서 하나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서로 잘 연결이 된 것을 우리는 응집력이라고 부른다. 자아(self-너와 대조로 나를 대표하는 의미의 자아) 응집력이 강하면 자신감이 높고 자아 응집력이 약하면 자신감이 낮다. 자아가 심하게 쪼개져서 분열되어 서로 완전이 소통이 안 되고 칸막이로 되어 있으면 정신분열, 자아분열, 해리성 장애(빙의 현상)로 나타난다는 이론에 첫 시발점이 된 것이다.

정신분석 치료 1세대들이 정신분열증을 분석 치료적 접근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Stone, 1983). 새로운 방법의 진화가 필수적이었다. 새로운 방법을 요람에서 죽지는 않았다. 정신분석학의 창설자들이 정신분열증을 성공적으로 치료를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1920년부터 1930년 대까지의 10년 동안에 정신분석 지역 사회 안에서 심한 혼란한 환자의 치료가 널리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름 그대로 전이 관계 분석이 등장하였다. 정신분석 치료 기법에 크다란 수정으로 정신분열증의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1918년 항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국제 정신분석학회 총회에서 프로이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수정으로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 한 사람이 파울 페드론(Paul Federn)이다(Rosenfeld, 1987).

페드론은 1905년부터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들 한데서 전이가 형성된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연약한 전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는 정신분열증 치료와 해리성 장애 즉 주체성 해리 장애(빙의 현상)의 치료에 바탕을 제공했다(Warkins, 1997). 그는 프로이드가 고안한 고전적 정신분석 치료 기법을 대폭 수정을 했다.

자유 연상을 포기했다. 그리고 부정적 전이를 피했다. 자아 안에서 긍정적 부분의 건강한 ego와 부정적인 병적인 ego가 쪼개져서 분열되어있기 때문에 병적인 ego의 등장이 우세하면 병적인 증세가 전체 성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보았다. 고로 건강한 성격의 부분을 강화시켜서 환자의 ego의 연약한 부분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에서 퇴행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이러한 그의 가설은 이후에 정신분열증과 심한 성격장애에의 치료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Warkins, 1997, Rosenfeld, 1987).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정신분열증 치료에 공헌을 했다.

정신분석가는 그 정신증 환자의 거짓을 수용해서 현실로써 나눈다. 그는 환자의 애도와 두려움을 같이 나눈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그 환자와 건강한 이성적인 부분들을 나눈다. 이 과정에 의해서 그 환자가 그 스스로를 이해를 한다고 느껴지는 것이 확실이 될 때 그리고 그 분석가는 거짓화에 반대가 되는 진실된 현실을 제공을 한다. 그 다음에 그는 그 환자에게 그의 실제 좌절, 애도와 이해들로써 직면을 한다. 그리고 그 환자의 깊은 두려움과 갈등들과 좌절들을 가지고 이것을 연결 시킨다.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을 수동적인 분석가의 태도에서 능동적인 태도를 강조하면서 분석 기법에 수정을 가해서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한 또 한 사람의 분석가는 웰헬름 레이크(Wilhelm Reich)이다.

그는 1925년에 출판된 "충동적 성격장애"라는 논문에서 많은 환자들이 심한 성격장애를 보인다고 기술하고 고전적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을 수정으로 성격장애 치료를 강조했다. 그는 28세의 나이로 비엔나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정신분석 치료 센터를 개설했다. 이들 환자들은 대부분이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그는 이후에 그의 이론이 성격장애의 치료에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이 적용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Stone, 1983).

위의 분석가들의 정신분열증 치료는 대부분이 걸어 다니는 정신분열증 환자들로써 통원 치료로써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를 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을 한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한 최초의 정신분석가는 어네스트 심멜(Ernst Simmel)이다. 그의 정신병원에서 분석치료 1929년에 출판되었다.

심멜(Simmel)은 환자의 질병이 수많은 병의 집합 중에 단지 한 개의 증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 형제, 배우자, 어린이들은 보상적인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멜의 아이디어에 이후에 현대의 가족 치료의 씨앗이 되었다. 정신장애는 기능이 잘 안 되는 가족 구성원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로 보았다.

심멜(Simmel) 1) 환자는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신경증을 표현한다 2) 병원 스텝의 눈에도 이 행동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반복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심멜(Simmel)은 알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회복이 되면 집에 남아 있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연결되어 가족 구성원들이 위협적으로 반응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 오랫동안의 분석 치료 기간이 필요하다.

병원 안에 살고 있는 환자들에게 외부 세계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체크해야 한다 치료에 보조 도구로써 인공적으로 방을 장식하거나 주변 환경이 아름다운 시골 여행을 하거나 친절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등이 병원 환경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외부 세계를 수용하고 마술적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간호원 스텝들은 간호사들에게 투사되는 환자의 갈등에 주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심멜(Simmel)은 프로이드의 구조 이론의 심리 역동적인 면을 받아들였다. 심멜(Simmel)은 그들의 정신병리를 오디팔 갈등과 거세불안의 기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10전의 기간 동안에 정신병원은 어려웠고 1931년에 심멜(Simmel)의 병원은 문을 닫았다. 프로이드와 심멜(Simmel)은 유감을 표명했다.

심멜(Simmel) 자신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L.A.에서 정신분석학교를 세웠다. 1947년 사망 때까지 그곳에서 정신분석 치료 소장으로 있었다. 심멜(Simmel)의 정신병원 입원 환자의 치료는 수년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분석 치료 모델이 되었다. 이 방법이 뉴욕 정신분석학교에서 1970년까지 심멜의 개념들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1 1로 마주보고 치료 상담을 하는 상담 면접 치료 기법이 정신분석 치료에 이정표가 되었다(Stone, 1983).

1920년 말기에 정신증에 대한 정신분석 치료 방법의 적용은 루드 번스위크(Ruth Brunswick)에 의해서 추진 되었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판사의 딸로서 비엔나에서 프로이드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프로이드의 신임을 받아서 프로이드가 치료를 했던 늑대 인간을 맡아서 계속 치료를 하게 되었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명문가의 후손인 늑대 인간은 심한 신경증으로 1910년 프로이드에 의해서 두 번씩이나 단 기간 치료를 받았다. 20년 동안 건강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 오다가 1927년에 장애에 굴복을 했다. 호모섹스 갈등과 편집증 아이디어가 특징을 이루었다. 이 병은 프로이드가 구강암에 걸렸다는 소식에서 촉진 되었다.

번스위크가 1940년대까지 늑대 인간을 치료했다.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번스위크는 이론적인 분야와 반대로 주로 평범한 일상에 흥미를 보였다. 1929년에 그녀는 질투 망상을 가진 한 결혼한 여성을 분석 치료한 것을 상세하게 기술 했다. 그녀의 기술은 직관적이었다. 그녀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부모의 친정 가족 관계에 주의를 집중했다.

번스위크는 그녀를 편집증으로 진단을 했다. 히스테리아와 편집증 정신분열증이었다. 환자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후에 곧 매일 치료 회기에 적응을 했다. 루드 번스위크(Ruth Burnswich)의 큰 심리학적 견해가 정신분열증 혹은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환자의 평가와 치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려고 하면 그녀의 동료였던 허만 넌버그(Herman Nunberg)의 견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경증에 관련된 많은 논문들을 쓰면서 그는 이 시기에 정신분열증에 대한 긴 논문을 썼다.

허만 넌버그(Herman Nunberg)는 정신분열증을 다루는데 비엔나의 동료들인 레이크(Reich)만큼 개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심리 신경증에 대한 프로이드의 이론적 설명의 영역 안에서 정신분열증의 설명을 집중했다.

넘버그는 정신분석 치료를 하려는 사람을 먼저 스승으로부터 개인 분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8년 부다페스트의 정신분석학회 대회 때 이 안을 제출했고 이것이 정신분석 학교에 표준 과정이 되었다. 1920년 비엔나 정신분석 학회에 제출한 논물 균열성 공격, 긴장성 공격을 제출했다. 그는 급성 정신분열증 에피소드에서 촉진 이벤트와 마음의 움직임의 기재를 가설화했다.

넘버그의 치료 기법은 고전적이었다. 카우치의 사용. 꿈의 접근 등을 강조했다. 능동적 치료는 아니었다. 넌버그(Nunberg)는 정신분열증 환자들도 전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환자들이 빈번하게 퇴행을 경험한다고 경고를 했다. 이 때는 행동이 언어를 대신해서 표현 수단이 된다고 했다. 루드 번스위크가 기술한 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인지 의심이 가지만 넌버그(Nunberg)의 환자는 정신분열증이 확실했다. 그는 생각이 주입됨을 경험했다. 생각이 제거됨을 경험했다. 다양한 영역 혼란들이 정신분열증이 확실했다.

넌버그(Nunberg)는 정신장애에 대한 이론적 접근에서 또 다른 보고를 보여 주었다. 정신분열적으로 신경증 환자를 치료할 때 회복은 억압이 제거되고 난 후에 시작된다. 정신분열증 환자 한데서 회복은 퇴행이 회복되고 난 후에 시작된다 라고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 치료적인 노력 속에서 고통스런 기억과 연결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회복이 온다고 억압 제거의 효과를 지적하고 있다. 이전 점에서 넌버그(Nunberg)가 투사 동일시의 기재를 이해를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콜롬비아 의과대학 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스톤(Stone)이 노트하고 있다(Stone, 1983).

초반기 정신분석 학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아니고 과학적 조직과 과학적 언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상호작용 관계뿐만 아니라 마음의 현상에 집중적 노력을 한 것이었다.

강조가 한 사람의 심리 즉 개인에 주어졌다는 점이다. 한 가족 안에서 부모와 관계해서 아버지의 중요성이 엄마의 중요성에 비해서 너무 강조되었다. 적어도 프로이드의 제자들로 1920년대까지는 그랬다. 스케레버에 대한 프로이드의 분석은 아버지 중심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스케레버의 아버지인 플레이시그 박사(Dr. Flechsig)였다. 1965년에 실(Seales)이 프로이드의 스케레버의 분석에는 엄마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지적했다. 어떻게 스케레버의 갈등이 엄마와 아들 관계에는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

스케레버의 망상에서 태양의 이미지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son이 sun으로 해석하는 것 보다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하는 해석이 없다. 1920년대의 넌버그(Nunberg)의 논문에서 우리는 강조점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즉 엄마-아기 관계의 흥미와 일반적으로 대인관계의 흥미 등을 볼 수 있다. 1930년 대에 들어가면 엄마와 대인관계의 이야기가 메라니 크레인, 셀리번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주어진다. 새롭게 등장한 큰 심리학들이 한 사람의 심리학 조직에서 두 사람 심리학 조직으로 크게 확대 된다. 즉 엄마와 아기 관계 치료자와 환자 관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 가족의 한층 더 복잡한 조직은 즉 세 명 이상의 가족 조직을 이후까지 넓게 주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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